독서광
독서에 일생을 바치고 책 속에서 지혜를 퍼 담아 온 사람들은 여행 책자에서 목적지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접하는 많은 사람들과 닮았다. 이런 사람들은 피상적인 정보를 많이 전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상호 연관된, 정확하고 심오한 지식이 없다. 반대로 깊은 사유에 전념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여행지에 직접 다녀온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기본적으로 주제를 이해하고 그 곳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읽긴했지만, 태생의 게으름으로 단지 수동적으로 책에 적혀져 있는 내용들을 겉핥기 식으로 습득했었다. 책에 대한 사유 따위는 하고자 하는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그냥 가벼이 읽어온 책들에 대한 태도는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만연해 있었다. 상황이나 현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보다 그러려니 하고 내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냥 관심을 끄기 바빴다. 책을 읽어서 그나마 중간은 간다고 생각했지만 노력도 없고, 사유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나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예전과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은 나의 모습은 발전한 타인들 사이에서 어느새 뒤처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거나 능동적인 무엇을 하는게 귀찮고, 손발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내일을 위해서 조금씩 해보려 한다.
동물학대
인간은 그냥 놔두면 세상의 반 바퀴 정도를 거뜬히 날 수 있는 새를 좁은 새장에 가둔다. 그 좁은 데 갇힌 새는 서서히 죽음을 갈망하며 우짖는다. 왜냐하면 "새장에 갇힌 새는 넋을 잃고, 즐거움 아닌 노여움으로 우짖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충직한 친구이자 영리한 개를 줄에 묶는다! 나는 깊은 동정심 없이 그런 개를 바라볼 수 없고 심한 혐오감 없이 개 주인을 쳐다볼 수 없다. 몇 년 전에 <<타임>>지에 실린 사건을 생각하면 마음이 흡족해진다. 덩치가 큰 개를 묶어 놓고 키운 주인이 한번은 그 개와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서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그 개는 주인의 팔을 위에서 아래로 덥석 물어뜯었다. - 아휴, 잘했다! 아마도 그 개는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오. 나의 짧은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악마요."라고 외치려 했을 것이다. 나는 개를 묶는 개 주인이 바로 그런 삶을 꾸리길 바란다.
동물원 방문객
사람들은 낯설고 희귀한 동물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지 못한다. 자극과 반응을 즐기려고 무조건 그 동물을 집적거리고 약 올리고 장난질 쳐야 직성이 풀린다.
번역
번역은 모두 생기가 없고, 번역 기법은 형식적이고 부자연스럽다. 그렇다고 번역을 자유롭게 하면, 즉 대충 번역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이 또한 잘못이다. 번역물로 채워진 도서관은 모사품을 전시하는 미술관과 다를 게 없다.
인간_사회적 존재
매섭게 추운 겨울날에 멧돼지 한 무리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서로 바짝 붙어 옹기종기 모여 섰다가 뾰족한 가시가 성가시게 느껴지면 다시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몸을 덥혀야 할 욕구가 생겨날 때마다 이 불편한 행위를 되풀이했다. 이 멧돼지들은 서로를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될 때까지 두 가지 고통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렸다. - 이 이야기처럼 인간은 자기 ㄴ면의 공허감과 권태감에서 생겨난 사회적 욕구를 채우려 서로 가까이 접근하지만 본인들의 까다로운 성질과 견디기 어려운 오류에 부대껴서 다시 서로 멀어진다. 그런데 그들이 마침내 찾아내는 중간쯤 되는 거리, 즉 그 지점에서 서로 어우러져 지낼 수 있을만한 거리는 바로 정중한 행위와 고상한 관습이다. 영국에서는 자기와 이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을 향해 "거리를 두시오"라고 외친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는 서로 몸을 덥히고자 하는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시에 찔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부터 내면에 열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이 사회와 거리를 두고 멀직이 떨어지는 편을 선호한다. 그건 남에게 불편을 끼치기도 싫고 그렇다고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사람과의 만남을 피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는 했지만, 내가 가진 이상한 태도로 상대가 의구심을 갖는 기미가 보이면 숨기 급급했던 것 같다. 상대가 나를 판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 판단이 부정적일 때 내가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자꾸만 집으로 숨어들었다.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면서는 사람과 만나는 경험이 더 적어져서 사람을 만나게 될 때에 대한 두려움, 실망감, 좌절감 같은 것들이 극대화 되었던 것 같다. 사회적으로 적절한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관계와 그 무게에 대해서 한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감탄고토 했을 뿐이었다. 어려서의 나는 사람을 얻는 것이 쉬웠기 때문에 버리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상대에게 내쳐진 경우도 많았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수도 없이 손절했다.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믿고 지내온 사람들이 소수 있었는데, 집에 숨어들었던 나는 최근 그 오래된 사람들 조차 잃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경험이 급격히 적은 나는 상처에 더욱 취약해졌고,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상처가 되고 끝을 내고는 후회하게 되었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하는 것은 나의 감정의 파도로 인해 같은 행동을 또 할지도 몰라서이다. 나는 몸 온도가 급변하는 멧돼지이다...